posted by 사막위의 돌고래 2018. 11. 20. 00:00

나는 사실 슬라임이다.




1. 슬라임. 나는 슬라임.

나는 슬라임이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팔다리가 없으며
신체에 단단한 부위가 없었다

따뜻한 곳이 좋고
축축한 곳이 좋았으며
몸에 닿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는 바위틈에 들어가고
뜨거운 여름에는 차가운 물웅덩이를 찾아다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를 인식한 직후에는 꽤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어떻게든 현실을 받아들였다.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 나와 비슷한 녀석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저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었다.


제한적인 감각들
동굴 밖의 나무에서 열매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날카롭게 느껴지는 촉감
밤과 낮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온도감각
둔중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청각

느리디 느린 두뇌회전 속도
아, 두뇌회전은 아닌가
뇌가 없으니

그런 제한적이 정보들을 조합하여 오랜 심사숙고 끝에 나는 내가 슬라임이 되었다고 결론내렸다.


정말 오래 걸렸다.

처음 내가 왜 이런 모습인지 과거의 나는 누구였는지 떠올리려고 했을 때, 잠깐 깊은 생각에 빠졌다는 느낌이었는데 돌을 뜨겁게 달구던 날이 끝나고 작은 개울이 얼어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 때는 운이 좋았다.
이후로는 생각을 잠깐씩 얕게 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짧게 짧게 꿈을 이어서 꾸는 감각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몸은 본능에 따라 어렴풋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몽유병이라도 걸린 듯 한 기분이었지만,
주변 슬라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움직임이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그렇지만 얻은 것도 별로 없었다.


분명 이 몸이 되기 전에는 인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 간단한 것조차, 겨울이 세 번 지나고서야 생각을 끝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별 거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체내로 흡수했다.
동물들에게 공격을 받으면 도망쳤다.
멍하니 햇빛을 쐬었다.

어느날 너무 멍하니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후회와 함께 멀리까지 돌아다녀볼 결심을 했다.

7일정도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상한 곳을 발견했다.
동물 시체가 잔뜩 있고 바짝 마른 나무도 잔뜩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그 곳이 일종의 거주구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돌아다니면서 흡수할 만 한 건 다 흡수해 버렸기에 더 살펴 볼 것은 별로 없었다.
지금에서야 산속에 있는 허술한 산적요새 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에는 생각을 깊게 할 수 없었기에 거기서 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구석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감각으로 봤을 때는 검인 것 같았지만 보이지 않으니 알 수는 없었다.
슬슬 지겨웠으니 기념품으로 하나 가지기로 하고 그 뒤로 나온 비슷한 것들은 전부 흡수했다.

기념품은 내가 마련한 보금자리 한 구석에 잘 놓아두었다.


그리고 다시 보금자리 근처만 돌아다니며 멍하니 지냈다.


그런데
너무 먹었던 걸까.

몸이 커졌다.

그렇지만 별 생각없이 계속 먹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물에게 공격을 받았다.
평소와는 다른 몸을 찌르는 감각.
평소와는 다른 동물의 발걸음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 동물들은 인간이었다.

아마 너무 커진 탓에 토벌대상이라도 되었던 것이 아닐까.

보금자리로 황급히 돌아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예전에 주웠던 검이 생각이 났기에 검을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검은 내가 만지자마자 바스러졌다.


나는 얼마나 살아왔던 걸까
그 시간동안 나는 살아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몸이 커지면서 생각도 어느정도 유연하게 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런 생각도 했지만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보금자리가 들켰다.


몇 번은 도망치고
몇 번은 공격하고
몇 번은 몸이 잘렸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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뒈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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